우리는 참 돈을 좋아한다. 돈에는 변수요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보다 돈을 믿는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의 억지 속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우리는 돈의 가치를 믿는다. 우리는 돈을 배신하지 못한다. 사람은 배신할 수 있어도 말이다.사람은 늘 변수요인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며 돈을 활용하고 돈을 버는 행위를 한다. 결국 돈과 사람은 별개가 아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잃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 때
경제는 인간이 하는 활동이면서도 동시의 인간의 계량적 수치가 반영된 분야이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가 흐릿해지면서도 동시에 명확해지는 사회 분야이다. 때론 수치로 인간적 가치가 평가되기도 하고, 반대로 수치로 계산되지 않은 지점에서 경제적 가치가 도출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수치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여주는 투명한 언어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그럴 때마다, 한 인간이 흐릿해지고 희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필자도 회사를 다니고 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과평가 등의 수치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
최근에 예술 작품에 대한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가 주목 받기 시작하면서 예술 작품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NFT에 관심이 많은 투자자들에겐 어떻게 보면 예술 작품에 대한 안목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오늘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과 각 예술 장르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예술 작품의 중요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예술의 진위 여부에 따라 ‘아우라’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우라란 예술작품에서 흉내낼
미래 기술의 가치를 계산하는 것은 경제인에게 있어서 참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소비자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 관련 미래 기술들은 분명한 필요성이 존재하면서도 그 기술적 비용과 경제적 이익 때문에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그래서 경제인들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미래 기술이 어떤 경제적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 기술이 실효성이 있는가의 문제부터, 미래의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술인지까지, 너무나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경제 이익에 대한 모든 판단은 ‘미래’를 어떻게 상정하고 인지할 것이냐의 문제다. 경제라는 것은 앞으로의 이익을 생각하는 과정 속에 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미래 가치를 생각하는 일은 경제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사고 능력이다.그런데 미래 가치 판단에 있어 우리는 어떤 관점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미래의 물성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자본으로 환원해서 미래 가치를 따질 수도, 공익적인 목적으로 미래 가치를 따질 수도 있다. 결국 경제적 주체가 어떤 관점으로 미래를 상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경제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둘 다 예술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예술 자체를 좋아하는 것과 예술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소유의 목적보단 그것을 향유하는데 목적이 있는 반면,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컬렉션’, 즉 작품을 수집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필자도 시집을 사서 모으는 취미가 있다. 시집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집을 사서, 저자의 ‘사인(Si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서부 개척을 통한 땅의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후에 지구의 모든 곳을 정복한 인류는 우주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쉬운지, 인류는 결국 과학 기술로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땅을 ‘만들고’야 말았다. 메타버스는 잘 알다 시피 3차원의 가상 세계로, 그 안에서 사회, 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가상공간을 뜻한다.문제는 메타버스의 시장 가치는 기존의 과학 기술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의 실질적 가치는 사람들이 메타버스 공간 속에 들어와 ‘시장’을 형성해야만 그 경제적 가치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알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을 알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도 있지만, 나도 그 사람에게 뭔가를 ‘원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욕망을 알고 싶은 마음은 어느 시대나 공통된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물은 서로의 ‘욕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그런데 경제활동은 생각보다 ‘서로의 욕망’을 너무나 잘 알고 시작한다. 일종의 경제적 공리로, 판매자와 소비자의 위치가 정해진 채 ‘거래’, ‘교환’을 한다는 것은 양측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
필자는 SNS를 자주한다. 그러면서 여러 개인들을 만나고 소통한다. 가끔 광고도 마주한다. SNS의 순기능도 있지만 최근의 SNS 광고를 보며 필자는 약간의 속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모두가 결핍만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사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말이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욕망하는 이유는 욕망이 결핍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욕망한다. 이렇게 볼 때 SNS에서 ‘결핍의 폭로’는 욕망이 충만하다는 것을 반증해 보이는 듯하다.그러고 보면 광고에서 욕망은 아주 중요한 키워드다. 기업 마케팅도 소
도적들은 대개 산채(山寨)로 모여든다. 이목을 피해 마을과 떨어진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노린다. 그들은 양민의 생명을 위협해서 금품을 빼앗아 연명하는 것이 직업이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은 마시고 노는 짓을 한다.물론 옛날이야기다. 그렇다고 그런 비슷한 짓을 하는 직업군이 오늘날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식 산채와는 외양만 달라졌을 뿐 기능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분화되고, 전문화되고, 더 탐욕스러워졌을 뿐이다.첨단지식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시장도 하나의 산채와 비슷하다. 그러나 시장은 시민에게 대가(代價)를 지불한다
강 건너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치다. 보이지 않는 체면의 논리다. 그것을 지키는 사회가 그런대로 살만한 고장이다.대한민국은 그런 면에서 심각한 지경에 접근하고 있다. 무슨 저명한 학자가 진단한 형국도 아니다. 장삼이사가 입에 달고 사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게 나라꼴이냐고 묻는 세상이 되어서다.한국인이라면 고스톱게임을 모를 리 없다. 셋이서 하는 게임이다. 참가인원은 무제한이다. 죽고 사는 것도 자유의사다. 그러나 세 명만이 최종게임에 주자가 된다. 민주적이다. 시장 경제적이다. 자신 있고,
‘시장이 반대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만들어 내지도 말고, 있는 것도 없애야 한다는 의미다. 산업사회가 태동하면서 사회적 친(親)시장적질서가 뿌리 내린지 오래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분야에서건 친시장적 가치를 외면하고는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의 한 방법으로 시장은 퍼포먼스를 받아들인다.우리 대통령은 퍼포먼스에 뛰어난 재간을 가진 분이다. 전 정권을 밀어내고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퍼포먼스에 능한 젊은이를 대동했다
시중에 떠도는 가담항설(街談港說)을 휘휘 거둬 볕에 말려두면 못해도 삼년 마른반찬 걱정은 없을 터다. 그 가운데 가장 짭짤한 항설은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과 그 졸개들이 저지르는 못된 짓과 관련된 것들이다. 숙성도 잘돼있어 맛도 좋고 듣는 이들의 마음과 썩 잘 어우러져 술안주로도 그만인성 싶다.이르러 선거철이다. 항설이 난무하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질이 예년과 사뭇 다르다. 아무리 항설이라고는 해도 극단까지는 닿지 않는 게 상식이다.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우선 치명적이다. 헌법이 정한 최고 권력에 내리는 극단의 형벌은 파면이
딱한 노릇이다. 나라안팎이 온통 중국폐렴바리어스 창궐로 요동을 치고 있다. 이 판국에 좌파정당은 시뻘건 욕망의 더듬이질을 해대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골자로 한 개헌을 하겠단다.빨갱이 천국을 만들겠는 것이다. 자유대한민국을 공산주의나라로 둔갑시키겠다는 것이다. 당장 법무장관이 되자마자 법을 무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설치는 여자가 일갈한 바도 있다. 중국식 토지공개념이 이상적이라고.시장의 필요성을 무시해도 된다는 얘기다. 비과학적인 집권자들의 오만이다. 설익은 지식인들의 자만이기도 하다. 시장이 없는 세상에서도 대한민국은 유지할 수
‘중국은 거짓의 나라’라고 일갈한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로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 소르망’이 그다. 그가 어쩌다 다른 나라를 모질게 비판한 까닭이 궁금하다.모르긴 해도 직업인 문명비평을 하기 위해 중국을 자세하게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경제사정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현대 중국의 속사정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방국의 공공기관 등을 통해 관련자료 등을 구해보듯 중국에도 그렇게 해볼 요량이었을 터다.허우대가 멀쩡해진 중국은 그러나 서방국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과학적 근거가 되는 경제 관련 자료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포식자(捕食者)와 피포식자로 나뉜다. 잡아먹는 무리와 먹히는 무리가 그것이다. 말없이 모든 것을 내준다는 야생의 나무도 예외는 아니다.소나무 빽빽한 곳에 다른 나무가 비집고 살수 없다. 밤나무 밀집한 곳에 아카시 나무가 뿌리내리고 살아내기가 거의 어렵다. 토양이 달라서도 아니란다. 종(種)이 ‘다른 생물이 살지 못살게 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시기하고, 내치고, 물리적 가학으로 못살도록 하는 원초적 본능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있어서다.시장도 포식자와 피포식자로 나뉜다. 경쟁이라는 물리적 작용에 의해 승
이란이 외과수술을 당했다. 꼭 죽어야 할 인간이 불과 3분도 되지 않는 순간에 거의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계 사람들은 비슷한 시간에 그 광경을 목도했다. 식구들과 밥을 먹거나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지켜 본 것이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 그대로다.도회지나 시골시장이 무너지고 있다. 삶의 현장이 그렇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남쪽사람만 모른다. 그는 그 무거운 입을 이따금 열긴 한다. 그때마다 우리나라 사람은 잘 산다고 한다. 걱정이 없다고 거듭해 말한다. 그는 워낙 지상천국에서 노닐기 때문에
모처럼 여름휴가를 얻으면 솔가(率家)해서 시골동네로 피서를 갔다. 향수를 불러오는 퍽 오래전 애기다. 그럴라치면 필수품 중 하나가 초자유리로 만든 소위 어항을 구입해 가곤했다.어항 아구리에 된장이나 깻묵을 이겨 붙여 물속 어소(魚巢)에 놓아두고 물고기가 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서 어항을 들어 올리면 잡고기들이 잡히기 일쑤다. 된장이나 깻묵냄새에 끌려 어항언저리를 기웃대다가 돌아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아무리 생각이 없다손 치더라도 저렇게 멍청할까 여기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버들치, 가재, 모래무치, 붕어 등
한반도라는 세계 한 귀퉁이 골목시장의 연말시황(市況)이 매우 불안하다. 엄청나게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찌들어있는 이곳 남쪽나라 사람들도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다. 물론 일부 주민들만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대개의 보통사람들은 여느 해와 달리 성탄절분위기가 여전만 못하다고 느낄 뿐이다.집권과 동시에 썩어들기 시작한 정권은 일찍이 인류역사상 거의 없다. 아무리 형편없는 정권이라고 해도 4, 5년은 지나야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재인정권은 불과 이태가 가기도 전에 진동했다. 썩은 내가. 그리하여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이다.나라
경제가 심리적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정설이 된지 오래다. 이런 주장이 처음부터 먹혀든 것은 아니다.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냉담한 반응에 부딪치기 일쑤였다.사회과학으로서 경제학이 승승장구하는 틈새에 이런 주장은 두드러지기가 어려웠다. 수긍은 하지만 경제의 과학적틀인 수학으로 입증하기가 난처했던 것이다. 지금도 심리적 상황과 결과를 수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난해한 작업으로 꼽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심리적 영향에 따라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었다. 그리고 시장은 이 정설을 몸과 마음으로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