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3.1독립운동과 폐교

 

10

 

저물 녘 대동강이 붉게 타올랐다. 물에 비친 고찰 영명사가 황금옷을 입고 찰랑거렸다. 그 사이를 거룻배 한 척이 천천히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강변 숲길에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함께 쓰고 젊은 남녀가 걷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주위 풍광을 만끽하며 속마음을 나누나 보았다.

아직도 정식은 풍광이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연광정을 거쳐 대동문, 을밀대, 청류벽 등 평양팔경에 나오는 명소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연당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는 연당청우(蓮塘聽雨)나 을밀대에서 봄을 감상한다는 을밀상춘(乙密賞春)조차 그저 연당과 을밀대를 지나쳤다는 사실만 기억될 뿐이었다. 풍광에 정신을 팔아 보려고 노력하려 했지만,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풍광에 눈을 멀게 했다.

을밀대 밑 둔치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정식은 고구려 장대인 최승대로 오르려다가 발길을 사람들 쪽으로 돌렸다. 낚시를 하거나 그물질을 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물에 흠씬 옷이 젖어 몸의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난 젊은 여인이 보였다. 사지를 벌리고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맨발에 노란 치마는 무릎 위로 걷어 올려졌다. 배는 불룩 튀어나왔다. 가슴께 자주색 옷고름에는 녹색의 부레옥잠 줄기가 걸렸다.

“임신을 했군.”

“칠성거리 앞 모랫말 사는 양갓집 규수라네.”

“무슨 한이 기리 깊었다누.”

“혼약을 했었디. 죽자 사자 연모하던 낭군감이 있었디. 그놈이 엊그제 대동문 안에 사는 갑부네 딸과 혼인식을 올렸다네.”

“쯧쯧. 기렇다고 강물에 몸을 던져? 연애를 했으면 다시 하면 되디.”

“애까지 뱄는데?”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정식이 듣는 사이 누군가 슬그머니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우산 대신 벙거지를 눌러쓴 추레한 중늙은이였다.

“내, 임자를 만나려고서리 아침부터 기다렸수다래.”

중늙은이가 손에 든 질그릇 종발을 디밀었다.

“나를 아시오?”

“전생에 우린 친구 사이였잖소. 난 전생을 똑똑히 기억하오. 암 기억하고말고.”

정식은 무시하고 돌아섰다. 비록 비렁뱅이였지만, 말투가 범상치 않았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갔수다래. 형편이 닿으면 찾아와 우리 함께 재밌게 놀던 전생 이야기를 나누자오. 기리고 나면 내게 몇 푼 적선할 마음이 절로 생길 거우다. 우리 함께 극락왕생해서 다시 재밌게 살아 보우다.”

정식은 등 뒤로 흘려들으며 강변을 벗어났다. 차라리 내가 물에 뛰어들면? 다음 생엔 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여관으로 향하면서 별안간 떠오른 생각을 정식은 내내 곱씹었다.

11

 

“어려워 말게. 어서 한 잔 들게. 자식까지 본 자네 아닌가.”

김억이 정식에게 술을 권했다. 정식의 어머니가 정식의 방에 차려 준 술상에는 여러 가지 생선요리와 소고기산적, 햇고사리나물, 데친 두릅 등 안주가 풍성했다. 인척인데다 정식의 스승이라고 해서 어머니가 갖은 정성을 들였다. 정식이 김억과 술자리에 함께 앉기는 처음이었다. 무척 어색했다.

정식은 평양에서 열흘쯤 체류하다가 남단동 집으로 급히 돌아왔다. 김억이 찾아왔다는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의 기별을 처가를 통해서 받았다. 작은아버지가 전하는 소식은 그뿐이 아니었다. 정식의 아버지 병 치료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신천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김익주 목사를 찾아가 상의하니 자신이 안수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고 장담했다는 것이다. 마침 김 목사가 가까운 신의주로 며칠 후면 사경회를 열러 오는데, 이 기회에 형의 안수기도를 부탁하자고 했다. 교사로 근무하는 재령에서 일부러 와서 할아버지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신천 온천에 병을 치료하러 왔던 환자가 온천욕으로도 낫지 않자, 김 목사를 찾아왔거든요. 김 목사가 안수기도를 하자 일주일 만에 감쪽같이 나아서 돌아갔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다니까요.”

할아버지는 이젠 미신 행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굿을 했어도 아버지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되레 악화되었다. 작은아버지는 이 문제 또한 정식이 남단동 집에 있으면 할아버지 설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나 보았다. 다행히 정식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할아버지 승낙을 받아냈다. 이틀 전 이미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데리고 신의주로 떠났다.

김억과 정식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다. 신의주로 떠난 아버지가 오다가다 무슨 사고라도 낼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찬경이처럼 만세운동에도 앞장서 나서지 못하고, 여자와 한 언약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전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무슨 소릴 그렇게 하나. 시인이 되면, 그 모든 게 용서된다네. 시로 사랑과 독립이라는 결핍을 메꾸게. 문학은 결핍에서 산생되네. 위대한 시인은 독립운동가나 언약을 중히 여기는 한 여인의 지아비에 못지 않다네. 그동안은 학생신분으로 시를 발표했댔지만, 이젠 정식 시인으로 대접받도록 문예지에 발표하도록 하세. 내가 곧 경성에 가네. 자네 작품이 실리도록 하겠네. 자, 어서 한 잔 들게.”

정식은 ‘결핍’과 ‘문학’이라는 말에 귀를 세웠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정식이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어허, 정식 군은 자신을 너무 낮추는 흠이 있어. 내가 보기엔 자네의 시적 재능은 아주 유별나다네. 그 방면으로는 자네를 따를 시인이 우리 조선엔 아직 없는 것 같다네. 자부심을 갖게나.”

정식은 별안간 먼데서 암흑을 가르며 천천히 다가오는 빛줄기 하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시가 과연 그런 극찬을 받을 만할까? 설마 취기에서 나온 공치사는 아닐까? 사실이라면 김억의 지도와 격려 덕분이었다. 김억은 그동안 정식에게 직접 시를 지도해 주었고, 시어도 다듬어 주었다. 정식은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틀고 술잔을 비웠다.

“자네는 시를 잘 쓰는 넘버원이 아니라, 누구의 아류가 아니라 자네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쓰는 오니원이 됐으면 좋겠어. 자네의 이상이 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오니원이 될 수 있어. 현실과 이상의 치열한 다툼을 통해 그어진 경계선이 자네 존재의 현재 가치이며 자네가 이룩한 이상의 가치야.”

김억도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김억은 프랑스의 베를레느, 구루몽, 노아유를 비롯하여 영국의 로버트 번즈, 워즈워스, 블레이크, 러시아의 투르게네프, 아일랜드의 예이츠, 인도의 타고르 등을 논하고 그들의 시를 읊었다. 정식은 어느새 자신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시인들의 곁으로 바투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바로 직전까지 태어나서 최악의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금광에 가서 일한다는 생각조차도 사치로 여겼는데……. 그 변덕 또한 부끄러웠다.

“세조 때 사람 최한경(崔漢卿)의 ‘화원(花園)’이란 시에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구절이 있네. 같은 땅에서 자라면서도 어떤 꽃은 특별히 곱네. 자네 시가 내게 그처럼 경이로움을 안겨 주었네. 내가 쓰고 싶었던, 아니 내가 써야 할 시들을 자네가 쓰고 있다네. 우리 시단의 미래가 자네의 시 속에서 강변의 금모래처럼 반짝이고 있다단 말이네. 자, 한 잔 더 들게.”

정식은 김억이 따라주는 술을 거푸 받았다. 그러면서 3.1만세운동 직전에 김억이 한 당부를 기억했다.

“정식 군은 달라야 해. 자네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시인이 돼야 해. 정신을 지키는 일은 나라를 구하는 일의 한 부분이지. ……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소질과 능력에 맞는 방법으로 저항해야 효과적이야. 저항한다고 해서 무조건 대들면 불을 찾아 날아들다가 타죽고 마는 부나비와 무엇이 다르겠나.”

당시에는 김억이 할아버지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고 여겼다. 지금은 김억의 말이 자신의 깊은 심중에서 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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