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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장편소설] 김소월 전기-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_2장 거미줄과 잠자리(5)

기사승인 2022.12.05  17: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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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거미줄과 잠자리

 

9

 

“정식아.”

어머니가 안채 대청마루 끝에 서서 손짓을 했다. 정식은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용하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빨래한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무표정하게 아랫목에 앉았다. 사랑방에서 전염되었을 법한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식도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고 어머니 앞에 앉았다.

“바른대로 말해라.”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식은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그 애랑 입을 맞추었느냐?”

어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아니.”

“그럼 그 애와 하룻밤이라도 잔 적이 있느냐?”

“없었어.”

“그럼 그 애와 그 짓을 했느냐?”

정식은 ‘그 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애 가슴이나 아랫도리를 만져 보았느냐는 말이다.”

“아니야. 그런 적 없었어, 절대로.”

정식은 도리질을 치면서 강하게 부인했다. 어머니가 안심하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다시 정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그 애와 같이 살기로 약속이라도 했느냐?”

정식이 이번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격정에 못 이겨 쉽게 내뱉는 말은 자기가 자신을 속이는 말이란다.”

“어머니가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저는 제 솔직한 심정으로 약속했단 말이야요.”

“격정에 사로잡히면 밤하늘의 별도 따다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단다. 네 아버진 신혼 때 내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라고 하더라. 믿어지느냐? 말할 당시에만 솔직한 심정이 될 뿐이야. 술 취한 사람의 허풍처럼.”

“어머니, 전 실행할 수 없는 약속은 안 해요. 저를 도와 줘요. 전 순이 누이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고 마음을 굳혔어요.”

“머잖아 그 언약이 허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야.”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요.”

“남녀 사이의 허언은 늘 그런 허황한 격정 때문에 시작된단다.”

정식은 무릎걸음으로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제발 할아버지를 설득해주세요.”

“네 아버지가 우리 집안을 크게 망신시키고 있는데, 너까지 그러겠다는 거냐? 네가 정신을 차려야 하느니라.”

어머니가 되레 정식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사정했다.

 

10

 

“뻐꾹, 뻐꾹.”

정식이 두 손을 입에 모아 뻐꾸기 소리를 냈다. 오순의 초가집 울타리 오동나무 밑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서. 전에 몇 번 그렇게 오순을 불러낸 적이 있었다. 노란 등잔불을 밝힌 창문이 울타리 너머로 보였다.

“뻐꾹, 뻐꾹.”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거듭거듭 뻐꾸기 소리를 냈다. 신호를 알아챘을 법한데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정식은 나흘 동안이나 밥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농성을 했었다. 가족 누구도 도무지 대화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어디 여자가 없어서 하필 밥 먹기를 징검다리 건너뛰듯 하는 소작농 딸이냐, 세상에 여자가 그 아이 하나뿐이라더냐, 네 나이엔 치마만 둘렀으면 다 좋다더니 그 짝이로구나, 따위의 하나마나 한 말만 고작 건넸다. 첫째 작은어머니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소될 풋사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못 친절한 설교를 했다. 모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신학문을 배운 정식의 말발에 걸려 일을 키우게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식은 너무 배가 고팠다. 그럴수록 마음속에서 순이에 대한 연모의 정은 점점 더 심지를 굳게 틀어박고 있었다. 어머니가 끼니때마다 방에 들어놓은 밥을 처음으로 몇 숟갈 떴다. 땅거미가 지자 말없이 집을 나왔다. 말없이 집에 왔던 것처럼 말없이 학교로 돌아갔다고 여기기를 바랐다. 오순네 집으로 향했다. 어디 먼데로 함께 도망치자는 배반의 결의라도 다지고 싶었다. 오순이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뻐꾹, 뻐꾹.”

마침내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귀를 가만히 세웠다. 사뿐한 발자국 소리가 아니었다. 마른 풀이 아무렇게나 발에 밟히거나 돌멩이가 발부리에 차이는 둔탁한 소리였다.

“살다 보니 별꼴 다 보는구나. 가을에 뻐꾸기 소릴 듣게 되다니. 콜록, 콜록.”

기침 소리가 곁들인 것을 보니 해수병을 앓는 오순의 아버지 목소리였다. 오순의 아버지는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정식의 멱살을 잡았다. 살펴보니 오순의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정식네 집 머슴인 팔복이도 곁에 있었다. 팔복이 손에는 몽둥이까지 들렸다. 두 사람이 합세하여 좀 떨어진 갈대밭 언저리로 정식을 끌고 갔다. 정식이 계면쩍게 웃었지만, 멱살을 잡은 오순의 아버지는 손아귀에서 힘을 늦추지 않았다.

“도련님, 제발 양반 체통을 지키쇼. 내일모레면 장가갈 사람이 왜 이리 집안에 흉 될 짓을 하는 거요. 신식 학교에 다니면 품행이 다 이렇소? 막된놈처럼 구는 것도 신식 풍조요?”

팔복이 정색하며 말했다.

“왜 팔복이까지 이러오?”

“도련님 버릇을 제대로 고쳐 놓으라는 분부를 받았소.”

“뉘한테?”

“뉘는 뉘요. 그런 말씀하실 분이 한 분밖에 더 있소.”

갈밭에 도착하자 팔복이가 보란 듯 몽둥이를 오순의 아버지에게 건넸다. 오순의 아버지가 정식을 밀쳐서 쓰러뜨린 뒤 몽둥이로 엉덩이를 거침없이 내려쳤다. 헉, 헉, 정식의 신음이 몽둥이질 소리를 뒤따라 터져 나왔다. 이 광경을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서운했다.

“곧 장가갈 사람이오. 살살 치오. 얼굴은 다치게 하지 말고.”

너무 심하다 싶은지 팔복이 주의를 주었다.

“내가 알게 뭐야. 콜록. 우리 딸년은 가슴이 새카맣게 탔어. 콜록.”

“이러지 마시고 누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할아버지를 설득해 달라요.”

정식이 하나마나 한 소리를 신음에 섞어 토해냈다.

“우리 딸년이 처신을 잘해 동네에 소문이 안 났기 망정이지…….”

다시 퍽, 퍽, 몽둥이질을 하는 소리가 어둠을 뚫고 퍼져나갔다. 정식은 자신만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기분이 들었다. 삶이 기어코 불행의 길로 접어드는 것만 같았다. 불행이 저 앞에 보이는데도 그길로 등을 떠미는 가족들의 몰인정에 치가 떨렸다. 정식은 바닥에 쓰러졌다. 순이 누이, 안 돼. 우리가 이렇게 갈라져선 안 돼. 냉천터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노래 부르던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 있겠어. 누이, 안 돼. 안 된다고.

“며칠 굶어 허약해졌소. 그만 때리기오.”

“뭔 소리야. 반 죽여 놓을 판인데. 조금만 더 빗나가면 내 딸년 혼인길이 막힌다고.”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정식의 귓전에 스치고 있었다. <계속>

 

 

이정 leejungm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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