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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장편소설] 김소월 전기-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_1장 스승 김억과의 만남(3)

기사승인 2022.09.26  08: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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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스승 김억과의 만남

3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빈 하늘을 갈랐다. 북소리가 꽝꽝 뒤를 이었다. 침묵이 깨지면서 교정에 활기가 돌았다. 흰 저고리와 검정 바지를 입고 팔을 번쩍번쩍 치켜드는 학생들의 대열이 교사 전면에 도열한 선생님들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악대는 대열의 맨 앞에 서서 힘차게 서양식 행진곡을 연주했다.

정식은 배찬경과 한 줄에 섰다. 사열대 앞을 지나간 행렬이 선생들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이 짓을 왜 하지? 왜놈들이 식민 지배를 고착시키려고 하는 수작에 우리가 놀아나는 거라고.”

배찬경이 투덜대며 침을 탁 뱉었다. 정식은 배찬경의 작은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배찬경과 함께 남산학교에 다니던 시절, 경성에서 측량기사로 일하다 귀향한 작은아버지는 남산학교 일본인 여선생이 진고개 유곽에서 버젓이 몸을 팔던 기녀임을 알아챘다. 작은아버지가 유곽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는 것이다. 작은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소문이 마을 고샅을 휘돌아 근동에까지 퍼졌다. 어떤 이들은 작은아버지와 같이 잠자리를 가졌다고까지 부풀렸다. 마을 유지들과 남산학교 교장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했다. 기생이 선생이라니 말이 되는가. 일본 놈들은 아이들에게 기생 교육까지 시킨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 말로 반일사상을 고취한다고 일본인들은 여선생을 비호했다. 그럼에도 여론은 여선생에게 점점 더 불리해졌다. 결국 여선생은 짐을 싸서 학교를 떠났다. 며칠 뒤 일본 헌병 셋이 배찬경네 집에 들이닥쳤다. 작은아버지를 붙잡아갔다. 곽산읍내가 바라보이는 고개에 다다랐을 때 헌병들이 담배를 피우는 틈을 타 작은아버지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마침 땅거미가 짙어진 뒤였다. 헌병들이 산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직후 작은아버지는 만주로 피신했다. 돈화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독립군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정식은 배찬경에게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공감하면서도 섣불리 민족학교를 자부하는 오산학교까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책략에 놀아나고 있다고 수긍하기 싫었다.

“나도 너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태평할 수 있었음 좋겠다.”

배찬경이 비꼬았다. 주위의 동무들조차 정식에게 비웃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너처럼 함부로 지껄일 수 있었음 좋겠어.”

그때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귀청에 파고 들었다. 제식훈련담당 교사가 쫓아와 지휘봉으로 정식의 등짝을 후려쳤다. 일시 파견 나온 일본인이었다. 대열이 우르르 한쪽으로 쏠렸다. 교사는 더욱 화가 났다. 정식은 교사의 억센 손아귀에 귀때기를 잡혀 대열 밖으로 끌려 나갔다.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고 다니던 지휘봉으로 등짝이며 엉덩짝을 사정없이 맞았다. 그러고도 교정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왜놈이 그만 일어나래.”

제식훈련을 모두 마치자 배찬경이 찾아왔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신 때문에 당한 봉변인데,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사과를 기대하는 자신이 되레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꼴이 되었다. 정식은 속이 뒤틀려 배찬경을 밀치고 앞서서 교실로 향했다. 조선인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본인들이 싫었지만, 당장은 배찬경이 더 싫었다. 머잖아 이 설움을 씻을 날이 올까? 그래도 이 설움은 일본인들에게 갚아 주어야겠지?

 

4

 

학교 울타리 가에 선 오래된 미루나무가 바람을 탔다. 이파리들이 초록 물결처럼 끊임없이 반짝였다. 먹이를 입에 문 노란 물새 한 마리가 이파리들 사이로 들락거렸다. 새끼들이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아우성 속에서 시작되는 삶이 그리움 속에서 시작되는 사랑과 닮은꼴일까? 먹이를 원해서 아우성치고, 사랑을 원해서 애달파하고. 그래. 부족은 언제나 채움을 원하는 법. 그렇다면 채움은 어디까지가 그 한계일까?

조선어 시간. 김억(岸曙 金億)이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숙제검사를 했다. 김억은 젊었지만, 조선 신시단의 개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오산학교 4회 졸업생으로 입학한 해로 치면 정식의 8년 선배였다.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다니다가 이태 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고향에 돌아온 계제에 모교인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창밖에 한눈을 팔던 정식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김억이 앞에 와 있었다. 정식의 노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노트를 얼른 접으려 했지만, 김억의 손이 먼저 노트를 집어 들었다. 김억이 노트를 한참 더 들여다보았다. 정식은 부끄러워 목을 외로 꼬았다. 노트에는 작문 숙제 대신 나름으로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김억이 노트를 들고 교탁 앞으로 돌아갔다.

“자, 제군들, 여기 주목하게.”

학생들이 자세를 바로 하면서 내는 소음이 잠시 이어졌다. 김억이 정식의 노트를 읽었다.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暎窓)에는 달빛, 매화꽃이

그림자를 산란히 휘젓는데.

아이 눈 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봄철의 밀물 소리…….”

 

- ‘애모’(愛慕) 일부

 

정식은 여자 동무들 앞에 벌거벗고 선 뜻밖의 순간처럼 창피했다. 자기 글을 순이 누이 이외의 사람에게 보여준 것은 처음이었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배찬경이 정식의 등을 찌르며 큭큭 웃었다. 정식과의 사이에 그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저 혼자서 전의 다정한 동무로 돌아왔다. 배찬경의 작은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뒤 정식의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 딸 혼사에 적잖은 축의금을 보냈다. 그만큼 두 집안까지 가까웠다. 더구나 배찬경은 불알동무였다. 정식을 아무렇게나 대한다고 해서 크게 화낼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얄밉기만 했다.

“밤마다 오순이 뒤꿈치 들고 가만가만 네게 오지 않을까 애가 탔구나.”

정식이 창피를 삭이며 목을 외로 꼬았다.

“네 손목에 맨 댕기로 오순이 목을 매서 끌고 와야겠구나.”

정식은 냉천터에서 오순과 작별할 때 오순이 손목에 매 준 댕기를 계속 매고 다녔다. 따져보니 댕기는 자신이 지닌 오순의 유일한 물질적 흔적이었다. 동시에 사랑의 증표였다.

그때 정식의 시야에 미루나무 밑에서 휘적휘적 교정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노인이 잡혔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썼다. 노인은 교사가 있는 둔덕까지 와서 창 너머로 이 교실 저 교실을 기웃거렸다. 정식의 학급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정식은 노인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엉겁결에 앉은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노인의 부릅뜬 눈이 정식을 알아보더니 곧장 교실 출입문을 향해 잰걸음을 놀렸다.

“조용!”

노인을 발견한 학생들이 웅성거리자, 영문을 모르는 김억이 교탁을 두드려 산만한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그래도 학생들은 곁눈질로 노인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하긴 우리 조선풍습으로는 김정식 군이 결혼할 나이가 되고도 남았네. 남자 나이 십대 중반이면 결혼을 하는 게 풍습이 아니던가. 그러나…….”

김억이 강의를 이어 나가자 마침내 노인이 출입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이놈!”

다짜고짜 지팡이를 치켜들고 다가오며 소리쳤다. 김억을 내려칠 기세였다.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억은 얼른 두어 걸음 물러섰다.

“네 놈이 우리 찬경이 상투를 잘랐느냐? 네 놈 것이나 잘랐으면 됐지 왜 남의 손자 것까지 잘랐느냐? 불상놈 같으니라고.”

김억은 양복을 입고 짧게 자른 머리에 기름을 발라 가르마를 탔다. 노인이 김억에게 성큼 다가갔다. 노인은 배찬경의 할아버지였다. 김억이 사태를 직감하고 재빨리 뒷문 쪽으로 달아났다. 그런 와중에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김억의 등짝을 후려쳤다. 김억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문밖으로 도망쳤다. 남산학교 시절 배찬경이 선생님으로부터 머리를 짧게 깎였을 때에도 배찬경의 할아버지는 학교에 나타나 소동을 피운 적이 있었다. 결국 배찬경은 뒤에 머리를 길렀다. 결혼을 하면서 상투까지 틀었다. 오산학교 역시 교칙에 따라 머리를 짧게 자르도록 했다. 배찬경은 자발적으로 상투를 자르지는 않았지만, 담임선생님이 자르라고 하자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따랐다.

“고얀 놈!”

배찬경의 할아버지가 김억을 뒤쫓았다. 김억은 담임선생님을 대신해서 혼쭐이 나는 셈이었다. 학생들의 눈길이 교실 밖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도 꽤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상투를 튼 어른을 집안에 둔 학생들은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배찬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할아버지를 뒤따라 뛰어갔다. 정식은 고소했다.

“이놈아, 자르란다고 상투를 잘라? 불알까지 잘라라. 너도 불상놈……”

배찬경에게 붙잡힌 할아버지가 배찬경를 꾸짖는 사이 배찬경은 할아버지를 불끈 들어 등에 업었다. 그리고는 교정을 향해 내달렸다.

“아니, 이놈, 이놈이…….”

할아버지가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배찬경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교문 밖으로 업혀 나갔다.

“주목! 여기 주목!”

김억이 돌아와 지휘봉으로 교탁을 두드렸다. 학생들이 자리를 정돈했다. 민망한 순간을 모면한 줄 알았던 정식은 다시 긴장했다.

“김정식 군! 시는 유치찬란한 연애편지가 아니네. 숙제를 안 해온 벌로 이 노트는 압수하겠네.”

“어! 안 됩니다. 안 돼요.”

정식이 황급히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김억은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교실을 나갔다. 할아버지에게 맞은 등짝을 주무르면서. <계속>

이정 leejungm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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