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라는 여자가 있다. 1926년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뉴욕 브롱크스에서 출생, 평생 독신으로 남의 집을 전전하며 보모, 가정부, 간병인 등으로 살다 2009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존재는 우연히 그녀의 필름과 사진 카메라를 경매로 낙찰 받은 길거리 사진가 존 말루프에 의해 사후 세상에 알려진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가정부 일을 하며 번 돈을 거의 모두 사진 찍는 일에 투자했다. 성능 좋은 카메라를 사고, 필름을 사고, 현상을 했다. 돈이 없어 현상을 못한 사진도 많았다. 하나의 피사체를 여러 장 찍어도 될 만큼 필름 값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한 컷, 한 컷, 심사숙고하여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그녀는 타인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피사체를 찍으며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평생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진정한 사진작가였다.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온전히 제 몫의 삶을 살고 갔다.

 

2013년 10월 24일, 울산의 어느 초등학교 아이들은 부산 아쿠아리움으로 소풍을 갔다.

2013년 10월 24일, 그 학교 2학년 이서현 여자어린이는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다고, 소풍만은 보내달라고 애원하다 계모에게 맞아 갈비뼈 16개가 부러지고 그 뼈에 폐를 찔려 죽었다. 서현이는 오 년 전부터 계모와 함께 살면서 갖은 학대를 당했지만 성격이 밝고 예의가 발랐다. 서현이가 세상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표정이 밝다. 그래서 인사성 밝고 명랑한 서현이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가정교육을 잘 시켰다고 계모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사고 전날 아파트 CCTV에는 소풍을 앞둔 서현이가 신이나 손장난 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만 8년. 서현이는 계모나 아빠 그리고 생모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죽었을 것이다. 죽는 줄도 모르고, 조금만 더 애원하면 계모의 마음이 풀려 보내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손뼉치고 노래 부르며 부산 아쿠아리움으로 소풍가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랬기를 바란다.

 

비비안 마이어, 이서현, 두 사람 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은영이 좋아했던 여자 시몬느 베이유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비정하고 더럽다고 한탄하는 사이, 많은 이름 없는 천사들이 우리 곁을 다녀간다.

 

어느새 은영이 떠나고 󰠏 이제는 그나마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불가능해졌다 󰠏 삼 년이 지났다. 은영이 없는 가을이 세 번 다녀가고, 겨울이 세 번 다녀가고, 또 봄이 세 번 다녀간 것이다. 하는 일 없이 황망하게 세월만 갔다. 그동안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준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쫓겨나고 새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나는 공자가 말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준다고 했던가. 세월은 우리들 심장에 지을 수 없는 추억을 새겨놓고, 우리가 받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확하게 제 길을 간다. 세월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많은 밤 그녀의 꿈을 꾸었고,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면 몽유병자처럼 자동차를 몰고 서울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러면서 날들이 흘러갔다. 일상은 정말이지 그 어떤 놀라운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소화해낸다.

이제 나는 안정적으로 일상에 복귀했다. 나는 열심히 기사를 써서 마감날짜 안에 넘기고, 사람들을 만나 유쾌한 농담을 나눈다. 더러 술자리의 시국담에 껴들어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인다.

 

지난 주말에는 자동차를 몰고 여주에 다녀왔다. 그녀가 34년 4개월의 생을 마감한 낙동강 지류 내성천은 차마 갈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친구들과 놀러갔던 하천의 이름은 ‘청미천’이었다. 지방이라 그런지 서울만큼 많이 변하지는 않아 몇 번 물어본 끝에 예전의 그곳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다. 건물이 바뀌었지만 수련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은영이 앉아 하모니카를 불던 너럭바위도 그대로 있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고마웠는지.

하모니카를 불던 은영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바위에 앉아보았다. 무심히 물비늘을 반짝거리며 하천물은 흐르고, 버드나무는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끝없이 하늘거렸다. 지난 24년 세월이 꿈만 같았다. 구름도, 햇빛도, 강물도, 새 울음소리도 모두 옛날 그대로인데 순식간에 24년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나는 장년의 사내가 되어 그곳에 혼자 있었다.

 

아아.

옛날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을 상대로 무한한 꿈을 꾸던 그 예쁜 소년소녀들은 어디로 간 걸까? 젊은 날 맺은 우리들 사랑의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가끔 나는 하모니카 소리를 환청한다. 적막한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 직원들이 모두 외근 나간 오후 사무실 복도에서 혼자 커피 마시며 하늘을 볼 때, 언뜻언뜻 하모니카 소리를 듣는다. ♬~~~♪♬♪~~♩♬~~~♩♩♬♪~~~~♩♬♪…… 무슨 곡인지는 알 수 없다. 은영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섬머타임>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하모니카 소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자신을 보여주는 낯설고도 친숙한 그런 순간…… 해맑은 얼굴의 단발머리 여학생…… 어린 은영이 나를 향해 손 흔들며 웃고 있다. 그 얼굴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영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녀의 전 생애가 내 전 생애를 향해 손 흔들며 웃고 있다…….

나는 안다. 그 옛날 그녀의 숨결을 통해 하모니카 떨림판을 빠져나온 음표들이 아직 대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나를 따라다니며, 여전히 내 귓전에 부딪고 있다는 걸. 그리움은 그렇게 과학을 초월한다. 내가 그녀를 놓아주든 놓아주지 않든, 내 가슴에 남은 심리적 외상(trauma)은 영원한 것. 그녀는 나에게 체코여인 남편의 한국어와도 같고, 트로츠키의 11월 혁명과도 같다. 저 소리를 들으면 나는 쓸쓸하긴 하지만 외롭지 않다. 지구는 내 별이고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아주 드물게, 어쩌면 평생 한번 올까말까하는 축복이다.

 

누구나 다 떠나가는 무서운 길, 그녀는 나로 인해 덜 무섭게 그 길을 떠나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추억만으로도 나는 어떤 고된 삶도 즐겁게 견딜 수 있을 것이며, 무인도에서 남은 생애를 혼자 산다 해도 지구를 아름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약했다. 약했으므로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다. 그렇게 얼굴 한번 보고 돌려보내고는, 다시 나를 불렀다. 그녀의 죽음을 내가 몰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는 꿈에 나타나 어떤 식으로든 작별인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이별하지 않게 해줘서 그녀에게 고맙다.

나는 이미 세상의 끈을 놓아버린 은영이 잡았던 마지막 끈이었다.

그녀가 나를 부른 것은 그녀의 권리였고, 내가 그녀의 부름에 따른 것은 나의 의무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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