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그 날 우리는 식사를 홀에서 하지 않고 방에서 했다.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은 음식은 먹으면 먹을수록 감칠맛이 났고, 그래서 우리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른한 몸을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르 아랫목에 누웠다. 따뜻한 온돌방이라 몸이 노곤노곤 녹는 듯했다. 밤을 꼬박 새운 우리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마음씨 좋은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를 깨우지 않았고, 우리는 어두워져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너무 많은 곳에 추억을 심어놓고 있었다. 뒷날 나는 혼자 추억의 고문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예전의 그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그녀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전의 그 방으로 들어갔다.

정식을 주문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도배만 새로 했을 뿐 거의 그대로였다. 그 날 꽉 닫혀 있던 미닫이 방문과 창문은 여름이라 활짝 열려 있었고, 창밖으로 짙푸른 숲이 보였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는 고즈넉한 절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육 년 전 그 날, 이 방에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미래는 우리 것이었고, 불행의 전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앉아 육 년 전을 회상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육 년쯤 후 혼자 이곳을 찾아와 오늘을 회상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마음 한구석으로 쓸쓸한 바람 한 자락이 지나갔다. 오늘은 그 날 때문에 아픈데, 그 날은 또 오늘 때문에 아프리라.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커다란 양은 쟁반에 음식들이 담겨왔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와 함께 깻잎, 두릅나물, 열무김치, 가지나물, 간장에 조린 꽈리고추 등의 반찬이 상 위에 올라왔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만든 찌개는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었고, 다른 반찬들 역시 모두 담백하고 뒷맛이 깨끗했다.

“모자라는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주인 아주머니가 홀의 빈자리에 앉아 야채를 다듬으며 한마디 건넸다. 표정이며 말투가 무뚝뚝했지만 나름대로 정감이 느껴졌다.

“아뇨. 모자라는 것 없어요.” 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음식이 참 맛있어요. 장사 잘 되세요?”

“그냥 먹고사는 정도죠. 나그네 손님들 보고 하는 장산데요 뭐. 그래도 기억하고 다시 찾아오는 사람 보면 고맙고, 그러네요.”

“저희도 두 번째예요.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2천 년 1월 1일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까지 잤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잠시 은영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우리에게 아직 아이는 없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아주머니는 서울에 아들이 사는데 결혼한 지 이 년이 넘도록 아직 아기 소식이 없다며 한참동안 걱정을 늘어놓았다. “피임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은영의 말에 아주머니는 며느리 말이 바로 그 말이라면서 또 한차례 불만을 토로했다. 아주머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핏줄을 잇기만 하면 사는 것은 어떤 식의 삶이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맛나게 식사를 하고󰠏󰠏󰠏은영도 제법 많이 먹었다󰠏󰠏󰠏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 계속 영월 방면으로 향했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 어느새 대지의 물기를 다 증발시켜버려,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동차에 부착된 디지털 시계가 오후 한 시를 가리킬 때쯤, 우리는 영월에 도착했다.

영월역 앞을 지나 시내로 들어섰다. 대충 시내를 한바퀴 돌고 골목 안 도로로 들어가보았다.

땡볕 때문인지 골목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철물점 앞 긴 나무의자에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는 동네 노인들 모습이 보였다. 8․15, 6․25, 5․16, 4․19, 5․18…… 전쟁과 혁명을 겪은 세대. 뜬금없이 그들 중 누군가는 평생 영월군을 벗어나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바다 밑에 사는 전복은 일생동안의 생활반경이 채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광활한 바다의 몇 미터 반경 안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거리, 똑같은 사람들, 비슷비슷한 사건…… 로터리가 있고, 상점가가 있고, 주택가가 있다. 몇 개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그리고 파출소와 우체국, 소방서, 군청과 읍사무소가 있다. 산다는 게 뭔지…… 갑자기 알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동차가 다시 차도로 빠져나왔다. 그 길을 따라 한참 달리자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이 나왔다. 조선왕조 왕릉 중 유일하게 경기도 밖에 있는 능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릉은 추존왕의 능을 제외하고는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조성되어야 한다.

매표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종 역사관을 대충 둘러보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와 재실을 구경했다. 그리고 사육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창절사를 지나, 언덕에 위치한 왕릉으로 올라갔다.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의 방해도 없이 내려오는 땡볕, 무심한 새 울음소리…… 어린 임금의 기구한 운명이 내 가슴을 애잔하게 했다.

아버지 문종이 죽자 단종은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임금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삼 년만에 왕위를 내놓고 ‘천만리 머나먼 곳’ 영월로 쫓겨난다. 열일곱 나이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찾아오고, 통인 하나가 끈으로 단종의 목을 매달아 죽인다. 단종의 시신은 강가에 버려지고, 시녀와 시종들도 함께 살해되어 버려지고, ‘누구든 노산군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하리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시신을 거두어 한밤중, 급히 지금 자리에 매장을 한다. 그리하여 그 위태로운 운명처럼 단종의 무덤은 산언덕에 자리잡게 된다.

허망한 권력. 어떤 권력자도 한꺼번에 두 여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장생불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목숨 걸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애쓴다. 형제간 부자간 살육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종의 복위와 관련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만 해도 사육신으로부터 시작해 이백여 명. 그리고 오백여 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르고,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호로로록 호로로록, 짹짹, 쓰쓰쓰쓰쓰 쓰쓰쓰쓰…… 무심히 하늘을 날며 새들이 운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모두 겹겹이 겹친 산봉우리들뿐이다. 피의 군주 수양대군은 아마 단종의 맥을 완전히 끊어버릴 작정으로 사람 드나들기 어려운 이 첩첩산중으로 유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군주의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은 신화가 되어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민중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능을 한바퀴 돌고, 얼마 후 우리는 오백여 년 전의 죽음을 뒤로 하고 언덕을 내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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