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50대 초반 남자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그의 뒤로 멀리 뿌옇게 흐르는 비안개에 반쯤 잠긴 마을이 보였다. 버스가 도착하고, 여고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내렸다. 아마도 그 아이가 딸인 듯, 남자가 꽃무늬 우산을 펴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뭔가 이야기하며 마을로 들어가는 신작로를 걸었다.

동화 속 삽화처럼 푸른 들판 사이를 우산 두 개가 부딪쳤다가 떨어졌다가 하며 둥둥 떠내려갔다. 나도 몰래 그 남자처럼 우산을 들고 은영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배달음식이 왔다.

창가의 식탁에 음식을 올려놓고, 창밖의 비 내리는 들판을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했다. 수저질을 하는 은영의 손이 많이 떨렸다. 나는 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어 그녀의 숟갈에 얹어주었다. 마치 무명 주렴이 뿌려지듯 조용히 내리는 빗줄기가 논밭을 적시고 있었다. 간간이 바람이 부는가 벼이삭들이 한 방향으로 출렁이곤 했다. 은영은 먹으면서 차츰 식욕이 돌아왔는지 잣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밖으로 나갔다. 자동차에서 하모니카와 함께 결혼사진이 든 액자 하나를 꺼내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내 손에 든 하모니카와 액자를 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나는 액자를 침대 머리맡에 세워놓고 창가에 기대서서 느리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최대한 나직하게 생각나는 대로 <사랑으로>를 불고, <스와니 강>을 불고, <헤이 쥬드>를 불었다. ♩♬~~♩♪♪~~♩♬~~♩♩♬♪~~♩♬♪♪…… 그녀가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천 년쯤 전에, 그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본 듯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다시 만전춘별사의 고려인 남녀가 생각나고, 내 영혼이 하모니카 선율을 따라 파르르 떨었다. 그 떨림이 끝나면 그녀는 가뭇없이 사라져버려 또 천 년쯤 뒤에나 그렇게 다시 간신히 조우하게 될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졌으면…… 이대로 멈춰졌으면…… 나는 간절히 빌며 하모니카를 불고 또 불었다. 그렇게 조금씩 날이 어두워졌다. 나는 방 안의 전등을 켰다.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고 볼이 아파질 때쯤 갑자기 실내 공기를 흔들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프론트라고 했다. 계속 있을 거면 요금을 더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따가 내려가서 지불하겠다고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 씻고 싶어.” 그녀가 말했다.

“씻어.”

“씻겨줘.”

응석을 부리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아직 목욕할 만큼의 힘이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알맞게 온도를 맞춘 물을 틀어놓았다.

방으로 돌아가자 은영이 옷을 벗다말고 배시시 웃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환한 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자 야윈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먼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양치질을 했다. 그동안 나는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모아놓은 팬티와 양말을 빨았다. 빨래를 하고 나서는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녀가 욕조 턱에 팔을 걸치고 머리를 길게 뺐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물을 붓고 샴푸를 묻혀 거품을 냈다. 그리고 거품을 헹궈내고, 린스를 하고 다시 깨끗하게 헹궈냈다. 그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욕조에서 나오게 하여 거품을 낸 수건으로 그녀의 온몸을 문질렀다. 가는 어깨, 겨드랑이, 목덜미, 등, 허리에 비누칠을 하고 거품을 씻겨냈다. 그리고 돌아앉게 하여 앞을 씻었다. 발가락도 사이사이 비누칠을 하여 정성껏 씻었다.

그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타일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내 손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발은 하얗고 예뻤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언젠가 이 발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할 거야, 하고 말하곤 했었다. 앞으로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 것인지…….

 

“아, 개운해.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아.”

욕실을 나와 다시 침대에 누우며 그녀가 말했다.

비는 약해지지도 않고 더 거세지지도 않고, 계속 같은 상태로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모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주 이따금 모텔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들 소리가 들려왔다.

텔레비전을 낮게 켜놓고 바라보다 문득 그녀를 돌아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침대 발치 쪽의 방바닥에 돌아앉아 그녀의 가방을 다시 꼼꼼히 뒤졌다. 위장약으로 보이는 것들뿐 이상해 보이는 건 없었다. 따로 표시해둔 약도 없고, 내가 보기에는 다 그게 그거 같았다.

옷도 뒤져보았다. 특이한 것은 없었다.

나는 우리의 여행이 길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긴 잠을 잤지만 피곤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여행지에서는 아무리 휴식을 취해도 여독이 풀리지 않는 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늦도록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열두 시쯤 모텔을 나왔다. 비는 아침까지 내리다 그제야 그친 상태였다. 모텔 앞 화단에 심겨진 장미의 초록 풀잎에 맺힌 무수한 물방울들이 보였다. 아슬아슬한 순수. 가지 하나를 톡 건드리자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고 도로로 진입해 천천히 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병풍과도 같은 절벽, 맑게 흐르는 물, 먼 산의 비탈밭…… 비에 씻긴 수려한 강원도 산천이 차창 밖으로 시원스레 스쳐 지나갔다. 하늘도 깨끗하고 들도 깨끗하고 숲도 깨끗했다.

어디쯤에선가 해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별어곡을 지나고 예미를 지나 영월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창을 열면 싱그러운 공기가 차안을 기분 좋게 휘젓고 빠져나갔다.

멀리 ‘시골밥상’이라는 간판이 달린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동차 속도를 늦췄다.

“어, 여기 기억나?”

시트에 푹 파묻혀 있던 은영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글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안 나? 육 년 전 우리 일출 보러 왔다가 돌아갈 때 이 길로 갔는데. 그리고 여기서 점심밥 먹었어.”

식당 옆 빈터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담벼락에 글자부분을 오려낸 종이를 대고 스프레이로 뿌려 새긴 이삿짐 센터 전화번호를 보자 순간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아, 맞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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