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자동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서울 시내로 들어섰다. 나는 강변북로를 타고 서강대교를 지나 상수동으로 진입, 연남동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멍하니 내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잘하면 은영과 함께 돌아오겠구나,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계단을 딛고 올라가 패잔병처럼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식탁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수를 마시고 멍청히 앉아 담배를 한 개비 피웠다.

옷장을 열어보았다. 은영의 겨울 반코트와 청바지, 머플러가 보였다. 그녀의 육체가 담겼던 옷들. 그 옷들이 나에게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옷장 문을 닫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는 일 분도 못 되어 다시 텔레비전을 껐다. 뭔가 중요한 약속을 잊고 엉뚱한 곳에서 딴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그녀는 어디에 사는 걸까? 뭘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바보처럼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집 안을 왔다갔다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가 참새처럼 재재거리며 장난을 치곤 했다. 그때 그녀는 얼마나 밝고 사랑스런 여자였던가.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안 때린 척 딴청을 부리던 그녀, 욕실에서 ‘자기야’ 하고 부르며 뛰어나오던 그녀, 언젠가 한밤중 베개를 가슴에 안고 ‘붕어빵 먹고 싶어, 붕어빵 먹고 싶어’ 조르던 그녀, 이따금 기분 좋을 때면 슬라이딩하듯 몸을 던져 큰 대(大) 자로 침대에 엎어지던 그녀…… 잊고 지냈는데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자 집 안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때는 없던 실내운동기구 헬스 사이클이 새로 자리를 잡았고, 냉장고는 중고에서 신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고 집에서는 컵라면 정도만 먹기 때문에 냉장고 안의 내용물이란 김치와 음료수, 캔맥주, 그리고 과일이 전부다.

이제 우리는 예전보다 풍족하게 살 수 있다. 이 방을 내놓으면 약간의 대출을 받아 목동에 20평대 아파트 정도 구할 수 있는 돈도 벌었다. 그런데…… 그녀는 도대체 왜 나를 부른 것일까. 다시 잘해볼 생각이 아니었나? 오늘 내가 뭘 잘못했나?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어보았다. 건전지, 메모장, 옛날 휴대폰, 사용하지 않는 열쇠고리, 메모리카드 등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하모니카 케이스가 보였다. 그녀와 살 때는 화곡동 부모님 사는 집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던, 그녀의 하모니카였다. 케이스를 열고 하모니카를 꺼내들었다. 조금도 녹슬지 않고 여전히 은색으로 빛나는 커버, 가지런한 홀󰠏󰠏󰠏 이십일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매끈한 금속커버를 손바닥으로 문질러보다가 가만히 하모니카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때 문득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스팸인가 했다가 지역번호가 경북 쪽이라 받아보았다.

“어디예요?”

은영이었다. 공중전화로 거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피로가 싹 달아났다.

“집. 방금 도착했어”

“네에󰠏󰠏󰠏 .”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그러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 “저기…… 우리 여행할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지금 여행할 수 있느냐구요.”

“……어디로?”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뭔가 부드러운 손이 가만히 심장을 꾹꾹 쥐었다 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그녀는 아까와 달라져 있었다. 말이 통하고 있다.

“그냥 아무 데로나.”

“얼마 동안?”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어요?”

“한…… 일주일?” 나는 막연하게 말했다.

“안 바빠요?”

“바쁜 일 없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든지 시간 낼 수 있어.”

바쁜 일은 많았다. 바쁘지 않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오늘도 간신히 시간 내어 안동에 다녀온 것이다. 낮에 대화가 잘 통했더라면 나는 며칠 있으면 휴가니까 기다려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지나갔다. 일단은 그녀를 만나봐야만 한다.

“그럼 다시 오실래요? 미안해요.”

“괜찮아. 어디서 기다릴래?”

“안동역에 있을 게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글쎄. 세 시간?”

“그런데요…… 나 돈 없어요.”

“바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전화를 끊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샤워까지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욕실을 나와서는 백팩을 꺼내 속옷와 양말 따위를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집안의 모든 등을 끄고 현관으로 갔다. 센서등 아래 급히 신발을 신다말고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엉겁결에 신발장에 몸을 기대자 그 바람에 신발장 위에 있던 꽃병이 기우뚱했다. 흰색수국이 담긴 꽃병이었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꽃병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내 손은 꽃병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잘못 건드려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 거실 바닥에 떨어져 떼구르르 몇 바퀴 구르는 꽃병. 구르는 꽃병을 따라 물이 쏟아지고, 시든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도 몰래 허, 하고 실소가 터져나왔다. 다시 들어가 청소를 할까 하다가 나는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아 그냥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타 백팩을 내려놓고 안전띠를 매려할 때, 하모니카가 한쪽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화를 받으면서 탁자 위에 놓았다가 백팩을 메고 나올 때 엉겁결에 집어든 모양이었다. 하모니카를 콘솔박스에 넣고 안전띠를 맨 다음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았다. 자동차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와 차도로 들어섰다.

다시 양화로로 나와 서교로를 타고 홍대 앞을 지나 강변도로로 진입했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자 내 마음은 안정되었다. 정신없는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길을 세 번째 달리는 중이지만, 조금도 짜증스럽지 않았다.

왜 갑자기 여행을 하자는 걸까. 안동에는 왜 간 걸까? 얼굴이 안 좋아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동차가 한남대교를 건너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톨게이트가 나왔다.

옆줄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뭔가 우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수석의 여자가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남자에게 내미는 모습. 남자는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여자 역시 정장은 아니지만, 단정한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젊은 부부 같았다. 인생이 짧고 사랑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자동차들이 다시 속도를 내며 주행선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도 1차선으로 진입해 속도를 냈다. 자동차가 아주 빠른 속도로 어두운 고속도로를 미끄러져갔다. 사르르르르…… 발 밑에서 아이스크림 녹듯 엔진 회전하는 소리가 부드럽게 올라왔다. 내 앞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미등을 끌고 아득히 뻗어 있는 어두운 길.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은영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어둠은 감미롭기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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