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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경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 <1회> 1장 유서(1)

기사승인 2023.03.20  10: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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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숲 작가

2023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를 연재합니다. 박숲 작가의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는 매주 1회씩 총 3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작품은 본지 홈페이지(www.finomy.com)와 네이버, 다음 등 주요 인터넷 포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박숲 작가

[박숲 작가 당선소감]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작품들이 당선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고 있었다. 한파가 이어진 어느 날, 마찬가지로 체념의 아침을 걷고 있었다. 녹지 않는 눈은 군데군데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앞서가던 아이가 더러워진 눈더미를 발로 찼다. 이유 없이 아렸다. 잔치가 끝난 뒤의 쓸쓸함. 그 순간 스팸으로 의심되는 전화를 받았다. 나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현대경제신문’ ‘대상’이라는 단어가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뭇가지 사이로 빠르게 통과했다. 그토록 맑고 투명한 아침햇살이라니! 수면제를 계속 복용해서라도 이 꿈 안에 머물고 싶었다.

언니는 젊은 아버지 얘기를 들려줬다. 윤동주와 김소월 등의 시집을 매일 필사하여 언니들에게 자랑했다던 아버지. 젊은 아버지 역시 나처럼 오랜 소망을 견뎠던 걸까. 나도 모르게 젊은 아버지에게 뛰어가 오랜 소망을 이뤘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싶었다. 소설에서 이중적 아버지를 등장시킨 것처럼 내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 앞에 서면 언제나 작게 오그라들었던 나를 작품 안에서 일으켜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탓에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웠다. 작품 안에서라도 진정한 주체를 찾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오래오래 골이 깊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관한 소설일 수도 있겠다.

늦게 뜬 별이 가장 빛난다는 말이 있다. 비록 늦었지만 나만의 빛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리라. 나의 별에 빛이 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스승님들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꾸준한 관심으로 작품을 돌봐주신 남상순 작가님, 당신이 아니었으면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햇살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예요. 작가로서의 윤리를 강조하시던 박상우 선생님, 장편의 진수를 알려주신 강태식 작가, 소설의 첫 스승님이신 윤후명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다.

글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붙잡고 괴롭혔던 나의 언니, 나보다 내 작품을 더 걱정했던 두 딸과 가족들, ‘너무나도 사랑해!’ 그리고 문학인으로서 방향을 아낌없이 조언해주던 이서안 작가님, 서현이 작가님, 마윤제 작가님께 특별히 감사 인사 전한다. 또한 응원을 아끼지 않는 ‘문학에 길을 묻다’ 카페의 다정한 문우님들을 비롯, 지면 관계상 호명할 수 없는 여러 문우들께 진심 담아 감사를 전한다. 제가 한 발짝 먼저 가 있을게요. 조만간 어깨동무하고 같이 걸어요!

마지막으로 내 작품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주신 현대경제신문에 머리 숙여 인사드린다. 오랜 소망 이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사평 -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는 전설적인 명품 기타 ‘루시퍼’를 매개로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젊은이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들만의 삶의 길을 만들어가는 소재가 신선하다. 밴드 그룹 ‘비따비(Vis ta Vie)’를 결성하며 작품을 종결하는 결말 또한 새롭다. ‘비따비’는 우리말로도 뭔가 색다른 의미를 생성하고 있지만, 프랑스어로는 ‘네 인생을 살아라’는 뜻이다.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틀을 벗어나 자신들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조금은 불안하고 불완전하나 이 또한 ‘젊음’이라는 위치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살인과 폭력이라는 부조리한 현상을 서사구조로 이어가지만, 완벽한 문장과 아름다운 문체로 이 음울한 기운을 흡수하는 솜씨 또한 매우 돋보였다.

 

   
▲ <삽화=조민성 화백>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장 유서(1) 

 

"인식의 문이 닦여지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윌리엄 블레이크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 대신 희망을 견딘다. 그편이 훨씬 안정적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십 대의 마지막, 그 사건이 터진 이후부터였다.

처음 록에 빠졌던 그 시절, 나는 이단의 추종자처럼 ‘기적’을 열렬히 믿었다. 기타 치는 뮤지션으로 성공할 것이란 기적을 믿었고, 록커의 전설이 되는 기적과 록계의 거장들처럼 삶도 사랑도 열정적으로 살 것이란 기적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정적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살다 스물일곱 살이 되면 장렬하게 죽으리라는 기적까지.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 밴드 리더였던 용주를 추종하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짧고 굵게!’

어떻게 사는 게 굵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27년이 짧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용주의 멋진 말투는 고교생이었던 많은 애들에게 전염처럼 번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들이 그토록 숭배했던 록계의 전설들이 모두 스물일곱 살에 죽었기 때문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브라이언 존스, 에이미 와인하우스, 짐 모리슨과 지미 핸드릭스를 비롯해 커트 코베인과 재니스 조플린, 그 외에도 많은 뮤지션들이. 스물일곱이란 숫자는 수능의 압박감을 잠재울 만큼 강력한 최면제와도 같았다. 그 시절 우리에게 ‘27’은 신비에 가까운 상징의 숫자였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바랐던 기적은 ‘거침없는 자유’였다. 아버지의 그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맘껏 내달리고픈 자유. 푸른 풀밭 위를 질주하는 검은 말처럼!

용주가 들려줬던 록의 세계는 그 어떤 환각제보다 강렬했고, 나의 모든 삶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 밴드 활동을 시작한 건 아버지라는 거대하고 육중한 문을 열고 뛰쳐나갈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여름 거친 소나기처럼 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순식간에 몰아치다 갑작스럽게 끝이 나고 말았다. 기적이란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바란다고 다 이뤄지는 것도 아니란 걸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깨닫게 되다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나는 끝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이후 내가 기적 대신 희망을 견디며 살아온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더욱 최악은 움켜쥐었던 한 조각의 희망마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무 늦었다.

이제,

엔딩을 연주할 시간이다.

 

*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까, 어떤 방식의 죽음이 당신을 가장 아프고 고통스럽게 할까, 당신의 일부인 내 몸을 흉하게 훼손한다면 당신은 괴로워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부터 생라면을 안주 삼아 여러 병의 소주를 마셔서 그런지 구토가 올라오고 머릿속이 흔들렸다. 당신이 내게 휘두른 골프채 드라이버의 뭉툭한 부분이 어른거릴 때마다 어깨뼈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핏발 선 당신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입에서 쏟아지던 날선 욕설들은 회장실 창문 유리를 모조리 부서뜨릴 기세였다. 비굴한 모습으로 당신의 매를 견디던 장면이 끊이지 않는 파노라마처럼 재생되었다.

체크아웃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한 시간쯤 지나자 모텔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눈이 작고 턱이 뾰족한 사내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숙박을 연장하겠다며 방값을 현금으로 건넨 뒤 사내를 돌려보냈다. 한두 시간쯤 지나 사내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청소를 하고 세면도구를 갈아주겠다며 내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방안에만 처박힌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걸까. 방안을 자꾸 기웃거렸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세면도구를 받은 뒤 청소할 필요 없다고 문을 닫았다. 침대에 다시 걸터앉아 잔인하게 죽는 방법이 뭘까 궁리했다. 방법이 문제였다. 핑계 같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죽음을 미루는 중이다.

당신은 쥐새끼만큼 하찮던 내가 갑자기 돌변하여 달려든 것에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겠지. 이를 갈며 가장 튼튼한 골프채를 골라 윤이 나도록 닦고 있을 테지. 당신은 내가 시체로 발견된다 해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것이고, 내가 벌여놓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만 골몰하겠지. 죽기 전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을 처참하게 짓밟고 싶다는 욕망이 소다수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회사를 뛰쳐나오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무시하고 짓밟아 대는 당신을 보면 분노와 증오를 가라앉히느라 곤죽이 되곤 했다.

습관처럼 손톱깎이를 꺼내어 손톱과 발톱을 잘랐다.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던 손톱깎이다. 나는 손톱이 조금만 자라도 견디질 못했다. 고교 시절 기타를 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기타를 칠 때 왼쪽 손톱이 길면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기타를 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손톱깎이는 내게 여전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의자에 몸을 묻고 손톱깎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디자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

어떤 사물의 기억은 때로 하나의 생명처럼 저절로 자라났다. 이 손톱깎이처럼. 강제로 닫아버린 기억과 떠밀리듯 도달한 현재의 나 사이에서 야생식물처럼 자라난 기억들. 그런 기억들은 돌볼 틈도 없이 저절로 자랐고, 또 다른 어떤 기억들은 수시로 잘라내어도 종양처럼 파고들어 기어코 기억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은 손톱이 밀려 나올 틈도 없이 손톱깎이의 날을 살 틈으로 밀어 넣어 피를 보고야 마는 무자비함으로 대했다. 이 손톱깎이는 좋은 기억과 잘라버리고 싶은 기억이 공존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다. 손톱깎이란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물건이었다. 기타를 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필수품인 물건. 그러나 ‘27클럽’ 이니셜을 새겨 넣은 순간 더 이상 평범한 물건이 아닌 특별한 물건이 되었다. 이제는 닳고 닳아 이니셜 자국이 희미해진 손톱깎이. 날개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한참 동안 손톱깎이를 들여다보았다.

‘27club, forever!’

이니셜을 새긴 손톱깎이를 밴드 멤버들에게 나눠줬던 소라는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여전히 기타를 치기 위해 손톱을 짧게 자르고 있을까. 어느 시점에서 멈췄던 기억들이 맹렬한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27클럽 멤버들과의 기억과 함께 도어스의 'The end'가 머릿속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용주 때문에 즐겨듣고 기타와 노래를 커버했던 음악.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한 음악은 점점 고조되듯 머릿속을 휘젓다가 심장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This is the end, beautiful friend 이게 끝이야, 아름다운 친구

……

Of everything that stands, the end 서 있는 모든 것들, 끝이야

 

‘The end’ ‘종말’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 당시에도 예감했던 미래, 지금의 현재 상황과 딱 어울리는 노래. 죽음과 동시에 내가 속한 세상은 완벽한 종말을 맞을 것이다. 짐 모리슨의 몽환적 목소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현한 가사와 절묘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그동안 음악과 관련된 것들은 의식적으로 차단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의식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음악의 알갱이들이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던 걸까.

참았던 울음처럼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강한 파동을 몰고 왔다. 진정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떨렸다. 그동안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억압이 개인의 감정까지 통제하는 힘을 갖고 있는 건 분명했다. 음악적 감성에 젖기 시작하자 내가 알고 있던 음과 리듬들이 동시다발로 밀려들었고, 오랫동안 기억의 소환을 기다렸다는 듯 용주와 소라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문득 그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죽음의 경계에서 몰래 꿈꿔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은 정상인가. 그들은 어떤 식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다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동자에 빛을 내던 소라. 일렉기타의 현을 자유롭게 타고 놀던 용주의 하얗고 긴 손가락.

억눌린 기억의 봉인이 해제되자, 마치 대자연의 온갖 소리와 향기와 감촉들이 일시에 깨어나 각자의 음색으로 연주를 하듯 혼란의 늪으로 빨려들었다. 가슴이 북을 치듯 둥둥 소리를 냈다. 나도 모르게 손톱깎이를 세게 쥐었고 날의 뾰족한 부분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맺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잇 집어쳐! 음악 따위가 뭐라고!”

먼지를 품은 채 눈치를 보던 사물들이 깜짝 놀라 일시에 몸을 떨었다.

“다 끝장인 마당에, 빌어먹을!”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집게손가락에 난 상처 부분을 꾹 눌렀다. 선명한 핏방울이 이슬처럼 손끝에 대롱거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증명해주는 물질. 티슈를 뽑아 피가 흐르는 손끝을 꾹 눌렀다. 죽기 전엔 모든 것이 간절해지는 건가.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생의 에너지가 죽음 앞에서 필사적 대결을 벌이는 것 같았다.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 ‘죽는 방법들’에 대해 적어둔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고통은 적게, 사후의 모습은 끔찍하게. 기왕이면 우아하고 깔끔한 결말이면 좋겠지만, 당신을 손톱만큼이라도 고통받게 하려면 끔찍한 방법이 최선이었다.

 

*

유서를 써야 할까. 유서를 쓴다면 누구에게 어떤 얘길 남겨야 할까.

 

1. 유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이 남기는 메모.

2. 유언: 생명을 다한 뒤 죽음을 맞는 사람이 남기는 말.

 

유서를 쓰는 이유는 뭘까. 죽는 순간까지 살고 싶은 마음과 충돌해서? 결심이 흐지부지 될까 봐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남은 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 마지막까지 스스로에 대한 변론의 심리? 젠장.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내가 속한 세계는 끝인데, 유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유서라면 대개 미안한 대상에게 남기는 마음이 클 것이다. 또는 생전에 풀지 못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유서도 있을 테지. 나는 전자도 후자도 포함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끄고 거울 앞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열어 노트와 펜을 꺼냈다. 노트 한쪽 면을 뜯어내어 맨 위에 큰 글씨로 한 문장을 썼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게 짓눌렸다. 유서를 쓰고 죽는다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지 않고 용서를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내 생을 압축하여 남길 수 있는 표현이 고작 이 한 문장이라니, 이토록 끔찍한 생이 또 있을까. 문득 슬픔이 몰려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도어스의 노래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Father, yes son, I want to kill you (아버지, 그래 아들아,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마약에 취한 짐 모리슨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가 내 목에서 흘러나왔다. 초점 잃은 두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탁탁 두드리며 후렴구를 불렀다.

 

Ride the highway west, baby (서쪽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요)

Ride the snake, ride the snake (뱀처럼 뻗은 도로를 타고, 뱀처럼 뻗은 도로를 타고)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계속 어딘가로 달아나는 중으로 보였다. 나는 큰 소리로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불렀다.

 

Father, yes son, I want to kill you (아버지, 그래 아들아,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Father, yes son, I want to kill you (아버지, 그래 아들아,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I want to kill you……!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나는 이미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들이 차례로 해체되는 중일 것이다. 유서에 무엇을 남길까, 와 어떤 방식의 죽음을 택할까, 의 문제는 이제 옆방에 투숙한 누군가의 일처럼 점점 멀어졌다.

결국 ‘나는 살인자입니다’ 한 줄을 쓴 종이를 마구 구겨서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내 목숨을 버린다 해서 사람을 죽인 죄를 씻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당신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유서에 그 사실을 먼저 적은 건 그 때문이다. 당신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 미니 냉장고에 넣어둔 새로운 소주병을 꺼내어 뚜껑을 따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쓰디쓴 액체가 식도를 가로질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몽환적으로 흐르던 음악이 일시에 멈춰버린 것처럼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혀 자꾸 느슨하게 풀어지는 감정에 화가 치밀었다. 나를 죽이는 것만이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판단에 혼란이 왔다. 알콜 탓이라 할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떠올린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강한 탓이리라. 음악은 원래 단단하게 얽힌 매듭을 순식간에 풀어주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계속>

 

차종혁 기자 justcha@finomy.com

<저작권자 © 현대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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